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 (문단 편집) == 정치 == 동로마 제국의 정치는 당연히 [[고대 로마]] 제국 시절의 정치 체제가 그대로 이어지되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수정되고 보완된 것이었다. 고대 말기 로마의 정치 개혁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관료 체계가 잡혀서 한때는 동방식 전제군주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콘스탄티노플에도 [[원로원]]이 만들어졌으며, 현대에 들어 동로마 제국의 공화적 면모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원로원이 실권이 없었다는 과거의 인식과 사뭇 다른 평가가 나오는 중이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와[*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골적으로 탐했던 시메온 1세의 경우, 92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후 세계총대주교 니콜라오스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기까지 하였으나, 동로마가 인정한 그의 제위는 어디까지나 '불가리아인의 황제'일 뿐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에 이어 두 번째로 로마 제국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지만(중국 황제가 이민족한테 '너도 황제 해' 허락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중국의 포지션은 통일 로마와 대응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니만큼, 통일 로마에서 1/4 정도로 쪼그라든 동로마의 입장에서 중국과 1:1로 비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열심히 두들겨 맞던 남송도 고려나 베트남이 외왕내제 하는 걸 부들거리며 모른 척 했을 뿐, 제대로 허용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불가리아인의 황제' 자리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시메온 1세는 이후 스스로를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고 부르며 마음껏 그 위세를 떨쳤다.]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스테판 우로슈 4세]]가 자기네 직함에다가 '로마 황제'라는 타이틀을 붙였던 것도 동로마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단행한 데서 기인했으며, [[오스만 제국|오스만국]]의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 자칭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대업을 이룬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 세력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라틴 제국]]의 황제들이 자기네 인장(seal)에다가 '로마 황제('''IMP(e)R'(ator) ROM(anorum)''')'라고 떡하니 박아놓은 것도[* 출처: Filip Van Tricht, 『The Latin Renovatio of Byzantium』 p.66.]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열거한 세력들이 '로마 황제'를 자칭하며 스스로를 '제국'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른 국가도 아닌 바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이었다. 당대 유럽 세계에서 '제국'이나 '황제'라는 개념은 어떤 형태로든('자칭'이거나(라틴, 세르비아, 오스만, 러시아)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았거나(신성로마,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과 연결 고리가 있었던 것들이다. 애당초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도 여성의 제위 승계를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법]]상 당시 동로마를 다스렸던 [[이레네|이리니]]를 황제로 취급하지 않은 채 로마 황제가 공석 상태임을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교황이 서로마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의 근거로 제시된 게 '콘스탄티누스 기증서(기진장)'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 및 그 후계자들에게 서방 황제 임명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이 기증서는, 훗날 [[레오 3세]]가 카롤루스 대제를 로마 황제로 즉위시키는 주요 근거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도 오랫동안 즐겨 활용되었는데 실제로는 이 문서는 위조된 것이었다. 다만 이 문서의 핵심인 이른바 '실베스테르 전설'(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로 가면서 교황 실베스테르 1세를 서로마의 통치자로 세웠다는 전설)은 5세기부터 전해지며, 따라서 문서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던 권리의 탄생보다는 존재한(다고 오해되던) 권리의 "문서 위조를 통한" 고착화에 가깝다.] 적어도 이리니의 선황, 다시 말해서 [[콘스탄티노스 6세]]까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가 정통 로마 황제'임을 서유럽인들 역시 인정했다. 그러나 살리카법이라는 것이 [[프랑크 왕국]]의 국내법에 불과했기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는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당대 유럽 세계에서 진정한 로마 황제로 경외되어 온 동로마 황제 자리마저 노림으로써 자기가 가진 로마 황제 직함의 '국제적인' 정통성에 쐐기를 박고자 했다. 사실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즉위의 진정한 수혜자는 카롤루스 본인이 아닌 [[로마 교황]]이었는데, 카롤루스에게 '로마 황제'의 권위를 부여한 주체가 교황이었으니 이를 거두는 것 역시 교황이 결정할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교황은 황제의 정통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이 오히려 교황이 채워 놓은 족쇄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안 카롤루스로서는 굳이 교황에게 설설 기지 않아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만큼의 독보적인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정통 로마 황제'인 동로마 황제로의 즉위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나도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리니와의 혼담 논의는 동로마 황제 등극이라는 최종 목표의 중간 과정이었던 것이다. 훗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동로마 황족과의 혼인을 이유로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한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카롤루스의 구상이 아주 허황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고부터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총 88명([[라틴 제국]] 출신의 황제 제외)의 황제들이 제위에 올랐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황제 계승법이 확립되지 않아, 오랜 기간 동안 권력 다툼이 극심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근본적으로 황제의 본질적 책무는 군사령관이었고[* 황제가 넷이나 되는 [[사두정치]]가 현대인에게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지만 황제가 군주보다는 군관구 사령관으로 이해된 당시의 환경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로마 시대에도 그것은 바뀌지 않아 군부의 지지가 있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지지가 없으면 실패하기도 했다. 반면 혈통이나 가문은 동로마가 멸망하던 무렵까지도 제위 계승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좋게 말하면 능력주의지만, 군부의 지지를 통해 황제가 옹립될 수 있다는 관념은 동로마 제국이 그 역사 동안 내내 [[쿠데타]]에 시달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국력을 낭비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황위의 안정적인 계승을 위해 그나마 자주 사용되던 방법은 [[사두정치]] 시절 확립된 공동황제 제도, 부황제 제도를 활용한 것이었다. 정황제(Augustus)가 부황제(Caesar)를 임명함으로써 사실상의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동시에 역할을 분담했다. 이것도 혼란기 때에는 각지의 군부가 정제와 부제의 계승 순위, 지명권을 생까고 자기들 마음대로 정제나 부제를 옹립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자는 황제의 자격이 없었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재위 1차 685년 ~ 695년, 2차 705년 ~ 711년)는 코를 잘린 후에도 자신을 쫓아낸 자들에게 복수하고 제위에 등극하였다. 제위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은 대개 [[안구|눈]]이 뽑히거나, [[코]]가 잘리고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코를 자른 이유는 신체에 손상이 있는 사람은 제위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 각각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 대신 눈을 뽑아 연금 하는 것과 그 자식들이 다시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코가 잘리고 폐위를 당했지만 멀쩡히 복위에 성공하고, 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다시 필리피코스에게 폐위되자 처형당했다. 그래서인지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관행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신체 절단형을 끔찍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세련되고 문명적인''' 정적 제거법이었다. [[콘스탄티노스 6세]]는 폐위될 때 눈이 뽑히고 죽었는데, 죽은 시기가 차이가 있어서 어머니 이리니 아씨나이가 특별히 죽을 수 있는 방법으로 눈을 뽑았다고 보기도 한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일반적인 서양 국가와는 다르게 [[환관]]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고위직에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것도 신체절단형과 관련이 있는데 '''애초에 거세당한 사람들이 황족이나 높은 귀족이다 보니'''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는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고귀한 신분의 인물을 잡아죽이는 것보다는 불구로 만들어서 제위나 권력 투쟁에 결격 사유를 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명확한 적장자 상속제가 없고, 군부의 추대를 받으면 황제가 될 수 있는 체제를 본 서유럽인들은 동로마에는 음모가 많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많은 실권이 황제에게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인사들은 사회 유망 인사인 동시에 유력 관료층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니카의 반란]]의 배후이기도 했고, 황통 단절 시에 섭정을 행하기도 했으며 후기에는 원로원 출신이 황제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원로원은 지방민의 의사와 군부의 의사를 잘 반영하지 못했고, 군부는 황제를 통해서 원로원과 대립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